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에서 북한 ‘특사 조의 방문단’을 만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받고 김 위원장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정부 출범 이후 첫 남북 정상 사이 간접접촉이다. 전날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사이의 고위급 만남 또한 처음이다. 두 접촉에서는 남북관계 일반론과 현안이 포괄적으로 논의됐으며, 분위기는 좋았다고 한다. 남북은 이제 관계 경색을 끝낼 새 출발점에 섰다.
북쪽의 적극적인 대화 의지는 주목할 만하다. 조문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모든 사람을 만날 것이며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겠다”고 의욕을 보였고, 김양건 부장은 “북남관계가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북쪽의 이런 유화적 태도를 단순히 전술적인 대화공세로 볼 이유는 없다. 북쪽이 남북관계 ‘관리’를 본격화한 데는 미국과의 협상 분위기 조성과 체제 안정 필요성이라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지만, 남북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결국 우리의 노력에 달렸다.
정부는 북쪽 조문단을 어떻게 대할지를 두고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북쪽이 애초 김대중 전 대통령 쪽과 접촉한 것과 관련해 정부 안에서 ‘통민봉관 시도’라느니 ‘사설 조문단’이라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이 대통령과 현 장관이 남북 접촉을 조문단과 인사차 만나는 형식으로 한 것이 그런 사례다. 남북 사이 현안이 산적해 있음에도 이 대통령이 30분 만에 면담을 마친 것도 부적절했다. 이런 태도는 “우리 정부는 언제, 어떤 수준에서든 남북 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대화와 협력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한 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와도 어긋난다. 남쪽의 강경기조 대북정책이 북쪽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는 일부 시각 또한 정세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단견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후다. 대화를 해야 한다는 데는 양쪽 다 동의하지만 방향과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이 여전히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북쪽은 연안호와 금강산 관광 문제 등 현안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다른 목적을 위해 남북관계를 볼모로 삼는 경우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자신의 여러 문제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정당한 우려에 대해 성의 있게 귀를 기울이는 것도 필수다.
우리 정부는 대북정책을 전향적으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핵문제 진전을 남북관계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스스로 만든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북관계와 핵문제가 선순환 구조를 이루도록 해야 하지만, 남북관계 진전은 그 자체로 큰 가치를 갖는다. 아울러 10·4 및 6·15 선언을 말로만 존중하겠다고 하지 말고 이행 의지를 분명히해야 한다. 남북 정상 사이의 이전 합의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북 합의 역시 이행을 담보할 수 없다. 정부가 말하는 ‘일관되고 확고한 대북 원칙’ 역시 기존 정책의 합리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상황이 남북관계 진전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남북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온 것만은 사실이다. 올바른 정책과 적극적 실천만이 더 나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정부는 지금 어떤 출발을 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는 물론이고 핵문제에서 우리 발언권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