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영변 원자로 냉각탑이 폭파되는 모습이 어제 지구촌 전체에 방영됐다. 북한 핵 폐기 단계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행사다. 북한이 원자로를 다시 가동해 무기용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음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지금 북한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핵 신고 및 냉각탑 공개 폭파의 주된 목적도 핵 폐기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바꾸는 데 있다. 미국은 북한의 이런 노력에 호응해 차근차근 대북 관계 개선 조처를 취하고 있다. 곧이어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 논의가 구체화하고 북-일 관계 정상화 교섭이 재개될 것이다. 핵 문제 진전과 맞물려 새로운 한반도·동북아 질서 구축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외교·안보 격변이다.
우리나라가 여기서 주도적 구실을 하는 것은 국제정치적·민족적 당위다. 한반도의 안정 없는 동북아 평화구조는 불안할 수밖에 없거니와 새 질서 구축은 통일 기반을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외교 역량은 과거 어느 때보다 취약하다. 의존적 외교를 자처하다 보니 미국·중국 등과의 교섭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고, 6자 회담 틀 안에서도 존재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북-미 협의를 옆에서 바라보며 미국에 매달리는 모습이 10여년 만에 재연될 정도다.
정부가 이런 상황에서도 대북 강경 정책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당국 사이 남북 대화가 끊긴 상태에서 북-미 및 북-일 관계가 진전되면, 우리나라는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 논의 등에서 발언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한반도와 관련된 주요 결정은 남의 손에 맡기고 우리나라는 부담만 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비핵·개방 3000’도 수정 또는 폐기해야 한다. 최근 정부 주장대로 이 정책이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을 남북 관계 진전의 전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병행하겠다는 뜻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부가 정말 남북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어떤 경우든 첫걸음은 10·4 정상선언과 6·15 공동선언 이행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남북 정상이 직접 협상하고 서명한 기존 합의는 무시하면서 대화를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