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한겨레> 자료사진
국정원. <한겨레> 자료사진

법원이 국가정보원에 ‘베트남 민간인학살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단했지만, 국정원이 다른 이유를 들어 해당 정보의 공개를 거듭 거부했다. 처음엔 ‘외교적 불이익 우려’를 들어 공개를 거부했다가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번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들고나온 것이다. 국정원이 정보공개 청구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법원 판결마저 무력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6일 <한겨레> 확인 결과, 국정원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티에프’(이하 민변 티에프)에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결정 통지서를 지난 24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원은 통지서에 “해당 정보는 ‘제3자의 개인정보’로, 당사자 동의 없이 해당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관련자들은 정보공개 소송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며 “본인의 개인정보가 타인에 의해 결정돼 공개되는 것에 동의하는지 여부 또한 확인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

앞서 민변 티에프는 지난해 8월 국정원에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가 1969년 11월 ‘퐁니·퐁넛 베트남 민간인학살 사건’(퐁니 사건)에 가담한 참전군인 3명을 조사해 작성한 문서 등을 공개하라”고 정보공개 청구를 낸 바 있다. 퐁니 사건은 1968년 2월12일 베트남전쟁에 투입된 한국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퐁니·퐁넛 마을 주민 74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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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정보공개를 거부했고, 민변은 ‘비공개 처분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행정소송 과정에서 1972년 중앙정보부가 퐁니 사건 관련자를 조사한 문건을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하기 위해 촬영했고, 국정원이 해당 ‘문건 목록’을 보관 중인 사실이 드러났다. 이 문건 목록이 공개되면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퐁니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진행한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다는 의미가 있다. 목록을 통해 조사 대상자와 조사 범위, 조사 방향 등을 파악하고 진술조서 외에 다른 문건이 있는지 추가 정보공개 청구를 해볼 수도 있다.

민변 티에프가 낸 소송에서 1·2심 재판부는 “해당 정보가 공개되면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국정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단했다. “국정원의 주장이 구체적 근거가 없는 가능성, 일반적 추론에 불과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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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법원 판결 뒤 보여준 국정원의 행태다. 국정원은 2심 뒤 상고를 포기하는 대신 이번엔 “개인정보 보호”라는 다른 이유를 내세워 정보공개를 거부했다. 이는 정보공개 청구 제도의 약한 고리를 악용한 것이다. ‘정보 비공개 처분 취소’가 확정되면 해당 기관은 관련 정보 공개 여부를 재심사해야 하는데, 이전과 같은 이유로 비공개 처분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이유를 들어 법원의 정보공개 판단을 무력화한 것이다. 민변 티에프 소속 김남주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행정소송 끝에 법원이 결정을 내린 사안이다. 국정원이 정보공개법에 나와 있는 비공개 사유를 하나씩 들어가면서 재차 공개를 거부하는 것은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변 티에프는 대응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법리 검토에 나섰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