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3일(현지시각)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핵) 목록을 요구하면 이후 검증을 둘러싼 논쟁에서 협상을 교착상태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북한에 촉구할 비핵화 조처의 앞쪽에 ‘핵 리스트 신고’를 놓는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강 장관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상응조처’와 관련한 미국 쪽의 ‘융통성’과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양쪽이 오래도록 ‘신고 대 종전선언’으로 맞서온 점에 비춰 이례적인 공개 언급이다. 마침 7일 4차 방북을 앞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도 같은 날 워싱턴 국무부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핵 리스트 신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미 외교장관의 이런 태도는, 주목할 만한 미묘한 변화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핵 리스트 신고’는 언급하지 않고 동창리와 영변 등 ‘실물·행동 중심’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제시한 대목과 맥이 닿는다. 남북 정상은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거듭 다짐하며, “동창리 엔진시험장·미사일발사대, 유관국 전문가 참관 아래 영구 폐기”(선의의 일방 조처)+“미국이 6·12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등 추가 조처”(조건부 추가 조처)라는 ‘비핵화 초기 로드맵’을 제시했다. 미국이 중시하는 ‘불가역적(영구적) 핵폐기’, ‘검증’(참관), ‘핵무기 없는 한반도’, ‘영변 핵시설’ 등이 담겨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예상보다 이른”(청와대 핵심 관계자) 방북 결정은 북·미가 협상 진전의 걸림돌이던 ‘신고-종전선언 프레임’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은 때문이 아니냐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강 장관은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핵 목록 요구’를 앞세우는 행위의 위험성과 관련해, 2008년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하고도 이후 신고·검증을 둘러싼 논란·불신 증폭으로 6자회담이 ‘파국’을 맞은 역사적 선례를 환기했다. 그러고는 “어느 시점에서는 북한의 핵 목록을 봐야 한다”면서도 “양쪽에 충분한 신뢰를 줄 수 있는 행동과 상응조치가 있어야 그 시점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 장관은 4일 국내 언론만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서 한발짝 더 나아갔다. 북·미 양국의 “70년간 (쌓아온) 불신”을 환기시키고는 “과거에 했던 방식과는 다른 어프로치(접근)”, 곧 “신뢰 구축과 함께 가는 비핵화”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융통성”을 7차례, 신뢰를 3차례, 불신을 2차례 입에 올렸다. 맥락은 “(불신을 눅일 신뢰 구축 차원에서)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상응조치를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 장관은 이날 회견에서 ‘다른 접근법’의 내용도 일부 언급했다.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의 등가적 상응조처’로 “종전선언”을 꼽은 대목이 그렇다. 강 장관은 “한-미 사이에서도 종전선언과 관련해 많은 협의가 있었다”며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의 이해도 상당 부분 진전돼왔다. 결국은 종전선언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그 밖에도 다른 상응조치들이 있을 수 있다”며 ‘플러스알파’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북쪽은 리용호 외무상의 유엔총회 기조연설(9월29일)을 기점으로 <노동신문> 등을 통해 ‘종전선언’과 ‘제재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다.
북한에 요구할 비핵화 조처의 입구에 ‘핵 리스트 신고’를 놓는 방식에 대해선 북한의 거부감이 아니더라도, 핵전문가들 사이에 많은 우려가 제기돼왔다. 예컨대 미국의 대표적 핵무기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는 9월27일 연세대 특강에서 “상호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신고·검증에 집착하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것”이라며 “북한의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제안을 받아들여 우선 폐쇄 작업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쌓은 신뢰를 동력으로 신고와 사찰 문제도 풀어나가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강 장관이 검증 절차가 포함된 북한 영변 핵시설의 폐기와 종전선언을 맞바꾸는 제안을 했다며, 이 방안이 북한과 협상을 재개하는 폼페이오 장관의 옵션(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고 내다봤다.
미국 정부의 속내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미 국무부는 핵 목록 신고를 미루거나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 행정부 방침을 묻는 <워싱턴 포스트> 질의에 답하지 않았다고 매체는 전했다. 폼페이오 장관도 회견에서 “종전선언이든 뭐든 협상을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강 장관이 회견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협의) 결과”가 중요하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서로 관점의 차이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폼페이오 장관이 방북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는 여전히 미지수”(3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여서다. “미국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 정부가 ‘핵 신고 문제’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 쉽지 않을 것”(미국 사정에 밝은 소식통)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북한의 대미 실무협상 창구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4일 오전 베이징에 도착했다. 최 부상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따라 방문해 한반도 상황에 대한 협의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은 이제훈 기자, 도쿄/조기원 특파원 mir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