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경제가 ‘재정절벽’ 상태에 빠져드는 시한(31일 자정)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정치권이 극적으로 협상 타결에 성공했다. 이번 합의로 미국은 20년 만에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단행하게 됐다.
민주당이 다수파인 상원은 1일 새벽 2시(현지시각) 합의안을 89 대 8로 통과시켰다.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도 이르면 1일 낮 표결 처리를 할 예정이다.
합의안의 핵심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 기간 중 공약한 ‘부유층 증세’다. 백악관과 공화당은 부부합산 연소득 45만달러(약 4억8000만원, 개인은 40만달러) 이상 고소득층의 소득세율을 현행 최고 35%에서 39.6%로 올리기로 했다. 이들 계층의 자본이득세와 배당소득세 세율도 현행 15%에서 20%로 상향 조정하기로 했다. 미국 소득 상위 1%에 해당하는 계층이다. 또 부부합산 연소득 25만달러 가구(개인은 20만달러)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에 제한을 두고, 500만달러 이상 상속재산에 대한 세율을 올리는 데도 합의했다. 전 소득계층이 부담하는 사회보장세 성격의 급여세는 2%포인트 상향 조정하기로 했다.

이번 합의는 감세를 정강으로 채택하고 있는 공화당이 1993년 이후 처음으로 증세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공화당은 감세가 노동·투자 의욕을 고취시켜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이른바 ‘공급주의 경제학’에 근거해 1980년대 이후 대규모 감세정책을 채택해왔다. 1980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낮췄으며, 조지 부시 대통령도 대규모 감세정책을 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만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마지못해 소폭 증세에 동의한 바 있다. 미국의 20년 만의 변화는 프랑스 등에서 불고 있는 부유층 증세와 함께 각국의 조세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로 인한 세수 증가액은 10년간 약 6000억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공약한 1조2000억달러의 절반에 그치는데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타협안으로 내놨던 8000억달러에도 못 미친다. 부시 전 대통령이 2001년과 2003년 단행한 대규모 감세안 중 20%가량만 원상회복시키는 수준이기도 하다. 민주당으로선 대선 공약으로 내건 부유층 증세를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공화당 쪽은 증세를 적용하는 소득 기준을 애초 오바마 대통령이 제시했던 25만달러에서 대폭 상향 조정하고 상속세 적용 계층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각각 절반의 승리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증세 못지않게 입장이 팽팽한 두가지 사안이 불씨로 남아 있다. 백악관과 공화당은 재정절벽 협상의 또다른 축인 정부지출 자동 삭감안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해 두달간 시행을 유예하기로 했다. 이른바 ‘시퀘스터’ 조항에 따라 행정부와 의회가 예산 삭감 방식에 합의하지 못하면 10년간 1조2000억달러, 연간 1090억달러에 이르는 국방·복지 등 예산이 자동 삭감된다. 31일 한도(16조4000억달러)에 도달한 국가부채한도 상향 조정안도 합의하지 못해 재무부는 임시방편으로 두달간 버틸 수 있는 특별 조처에 들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은 31일 협상 타결 직전에 연 기자회견에서 “불과 지난달만 해도 부유층에 대한 증세에 동의하지 않던 공화당이 세율을 영구히 올리는 데 합의했다”며 “내가 앞으로 정부지출 삭감을 통해서만 재정적자 감축을 할 것이라고 공화당은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두달간 협상에서 지출삭감 외에도 추가 증세를 추진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화당 일부 의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합의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골대를 이동시키고 있다”며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민주당 일각에선 부유층 증세 기준을 너무 양보한 데 불만이 나온다. 톰 하킨 상원의원은 “이번 합의는 앞으로 미국에서 중산층 기준을 연소득 45만달러 이하로 정하자는 안”이라며 “민주당이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워싱턴/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