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확정된 고교 <한국 근현대사> 수정 내용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정안이나 다를 바 없다. 가장 논란이 된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경우 강제 수정된 33곳의 내용 대부분이 지난달 26일 교과부가 금성출판사에 보낸 수정 지시안과 거의 똑같다. 교과서 집필자, 역사 교사·학자들이 “출판사는 들러리일 뿐, 정부가 교과서를 직접 수정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뉴라이트쪽 주장 반영…‘이른바’ 넣고 ‘결국’ 빼
금성출판사 교과서 ‘김수영 시’ 등 자료서 빠져
두산출판사 것엔 이명박정부 ‘화려한 출범’ 담겨
가처분신청 결과따라 교과서발행 차질 빚을수도

■ 뉴라이트 입맛에 따른 무리한 수정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포럼이 ‘분단의 책임을 남한으로 전가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며 수정을 요구한 부분이 대체로 반영됐다. 교과서포럼은 금성의 253쪽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부분을 ‘반미적 표현’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교과부는 이를 ‘수정 지시안’에서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최종안은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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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부의 무리한 ‘첨삭지도식’ 수정 지시도 그대로 최종안에 담겼다. 교과부는 국방부가 요구한 “북한은 1946년 2월부터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금성 265쪽) 부분에서 ‘민주개혁’ 앞에 ‘이른바’를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대로 고쳐졌다. 집필자들은 민주개혁에 붙은 따옴표가 ‘이른바’라는 의미로 ‘이른바’가 중복되는 등 문장 표현만 어색해진다고 거부한 바 있다. 교과부는 또 “결국 북한은 남한 정부가 남북 대화를 …”(금성 309쪽)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결국’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최종안에서는 ‘결국’이 ‘이후’로 변경됐다.

이런 식의 첨삭 수정 탓에 애초 수정 권고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가 삭제되는 등 교과서가 ‘누더기’가 됐다. 금성 교과서 257쪽 ‘자료3’으로 실린 김수영 시인의 시 <가다오 나가다오>와 ‘미·소 군정에 대하여 당시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추론해 보자’라는 ‘과제3’은 이번 수정 과정에서 같은 쪽에 있는 ‘자료1’과 ‘자료2’에 내용이 첨가되면서 지면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빠지게됐다. 또 수정권고를 받지 않은 두산동아는 이번 수정과정에서 나머지 5종의 교과서에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이명박 정부의 긍정적 내용을 느닷없이 첨가했다. 두산 교과서 309쪽에는 “이명박 정부는 활기찬 시장경제, 능동적·예방적 복지, 인재 대국과 과학 국가, 글로벌 실용 외교, 한반도 평화 정착 등을 내세웠다”는 내용이 새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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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 입맛에 따른 나쁜 수정 선례” 역사학자들은 교과부의 이번 결정을 두고 “검정도서가 정권 입맛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역사학)는 “정권의 코드에 맞추기 위해 교과부 관료들이 저지른 무리수”라며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도면회 한국역사연구회 회장도 “학문적 자유를 침해한 것은 물론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호하는 저작권도 훼손한 것”이라며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중립성은 완전히 내팽개쳐졌다”고 말했다.

역량 있는 역사교사와 학자들이 교과서 집필에 나서지 않거나, 집필에 나선다고 해도 저자들이 자기검열 등으로 교과서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미 지난 10일 2011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금성출판사의 새 역사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 교수·교사 10명이 “교과서 수정이 철회되지 않으면 교과서 집필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또 교과부가 ‘2011년부터 쓰일 역사교과서의 편향성 문제를 사전에 막는다’는 명분으로 검정 절차를 마친 뒤 국사편찬위의 감수를 받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국정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부르고 있다.

교과부는 수정된 내용을 반영해 내년 1월부터 교과서 인쇄에 들어가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내년 2월 중순께까지 각 고등학교에 새 교과서 배포 작업을 마칠 계획이다. 하지만 금성 집필자들이 제기한 저작권침해 가처분 신청 결과에 따라 교과서 발행 등에 차질을 빚을 수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김소연 유선희 기자 dan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