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 제공
리움 제공

2004년은 한국 미술관 역사에 큰 점을 찍은 해다. 그해 10월13일 서울 남산 기슭 하얏트호텔 아래쪽 한남동 언덕배기에 삼성미술관 타운이 8년여 공사 끝에 문을 열었다. 건축 거장 마리오 보타와 장 누벨, 렘 콜하스가 합심해 설계한 고미술 전시관 ‘뮤지엄 1’과 근현대 미술관 ‘뮤지엄 2’, 어린이 교육·문화 시설인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로 이뤄진 ‘리움’의 탄생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성씨 리(Lee)와 미술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의 움(-um)을 합쳐 명명한 리움은 총 대지면적 2400평, 연면적 8400평에 들어섰다. 원래 주택지였던 대지의 지하 암반을 조심스럽게 깨면서 20m 이상 파내어 지은 이 미술관은 일찍이 볼 수 없던 시설과 규모를 자랑했다. 동서양 미술과 고미술, 현대미술이 어우러진 리움의 개관은 국내에 처음으로 세계적 수준의 명품 미술관 등장을 알린 사건이었다. 홍라희 관장은 당시 개관식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사랑하게 하고, 청소년들이 문화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보금자리, 한국 미술의 정수와 세계 미술 흐름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2004년 10월13일 개관식 때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관장
2004년 10월13일 개관식 때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관장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포부는 얼마나 실현됐을까. 우선 리움이란 이름 자체는 한국 미술계 부동의 권위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퇴락하던 주변 이태원 동네는 리움이 들어선 뒤 전시공간과 명품숍 등이 들어서 새로운 문화 발신지로 거듭났다. 앤디 워홀, 매슈 바니 등 보기 힘든 외국 유명 작가들의 명작들을 직접 보는 즐거움도 선사했다.

“한국미술 정수와 세계 흐름 소개” 포부 속 대형기획전·개인전 앞장 삼성가 비자금 파문 등 휘말리며 전시·연구 활력 잃고 조직도 축소“한국 대표 컬렉션 명성 걸맞게 열린 시각으로 다양성 수용해야” 다음 10년 누가 이끌지 관심 쏠려

그런데 개관 기념일을 한달여 앞둔 지금 리움 안팎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리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 쪽은 별도의 개관 기념행사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 19일 시작한 10주년전 ‘교감’의 개막식을 27일 비공개로 열고, 개관 기념일 당일 외국 비평가 니콜라 부리오의 강연회를 예정한 게 전부다. 이례적으로 단출한 일정이다. 무엇보다 리움을 만든 당사자이자, 10년간의 성과를 축하해야 할 주인인 삼성가 총수 이건희 회장이 지난 5월 이래 와병중인 탓이 크다. 홍 관장 이후 후계 구도가 불투명하고, 리움을 보는 세간의 시선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 등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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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리움의 십년은 바람 잘 날이 별로 없었다.

공사 전 터를 정하는 과정부터 진통이 빚어졌다. 원래 삼성가가 90년대초 미술관 터로 지목했던 곳은 서울 북촌 운니동 옛 동양방송 스튜디오 일대였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설계시안까지 받았지만 터의 매입과 접근성 문제 등이 풀리지 않아 무산됐다. 90년대 중반 삼성 쪽이 사들인 송현동 옛 미 대사관 직원숙소터(현재 한진그룹 소유)도 유력한 대상지로 거명됐지만, 곧장 터진 외환위기사태로 물거품이 됐다. 결국 한남동 이건희 회장 자택 부근에 별도로 추진해온 공익문화타운 예정터가 미술관 보금자리로 확정된다. 이 회장은 원래 이곳에 개인컬렉션 수장고와 평소 애호해온 도자기 뮤지엄을 짓고, 세계적 건축가들이 설계한 다용도 건물군까지 들어서는 건축·미술의 명품 단지를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러 사정들로 부인인 홍 관장 주도의 종합미술관 건립안이 합쳐지면서 공공성이 가미된 복합미술문화공간 쪽으로 방향을 틀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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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개관 직전인 2004년 8월, 미술관 지하 기계실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난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이 화재 사건은 다가올 풍상의 전조처럼 비쳤다. 홍 관장은 풍수학자 최창조씨와 서울 남산 기슭의 리움 터 주변을 상세히 살피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들머리에 리움의 안녕을 바라는 부적 표석을 설치할 만큼 터 기운을 다독이려는 삼성가의 의지는 절절했다. 하지만 이런 성심과 노력에도 리움은 개관 직후부터 삼성가에 불거진 미술품 관련 스캔들의 무대가 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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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 건축 거장들이 점등 버튼을 누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참여 건축 거장들이 점등 버튼을 누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전시 면에서 리움은 착실했다. 10년간 20여건의 기획전과 스타 작가들의 개인전과 교육 프로그램들을 꾸준히 마련해왔다. 이중섭의 드로잉전(2005)과 ‘앤디 워홀 팩토리’전(2007), 서도호 개인전 ‘집속의 집’(2012) 등은 대중의 반응이 뜨거웠다. ‘조선 말기 회화전’(2006), ‘조선화원대전’(2011) 등 최고 컬렉션에 바탕한 일부 고미술전도 호평받았다. 정보기술(IT)을 접목시킨 디지털 돋보기를 처음 배치해 유물의 세세한 질감을 살필 수 있게 한 시도는 선구적이었다. 아쉬운 건 영국 테이트모던처럼 글로벌 시대 부침을 거듭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이나 다양한 담론의 갈래들을 포용하는 개방성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유망 작가 전시인 ‘아트스펙트럼’은 젊은 작가들의 로망이 됐지만, 평단에는 ‘담론 없는 쇼’ ‘작가를 줄세우는 권력 장치’라는 뒷말이 따라다녔다. 1, 2, 3 전시관으로 10년째 분절된 리움 상설전의 경직된 공간은 위계적인 일류공간 인상을 강화시켰다는 지적이다. 한 중견 평론가는 “미니멀 단색조 같은 모더니즘 미술에 비해 리얼리즘은 계속 외면받고, 개인 소장품을 관리하는 ‘프라이빗’ 성격은 더욱 짙어졌다”며 “과거 호암갤러리 때보다 공공적 기능은 퇴행했다”고 꼬집었다.

컬렉션에서 리움은 삼성가와 한 몸이다. 미술품 추문, 의혹들은 곧장 리움으로 번졌다. 2007년 삼성가 비자금 파문 때 리움은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휩쓸렸다. 홍 관장과 시누이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이 2002~2003년 비자금으로 로이 릭턴스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 세계적 대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투기 이득을 취했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계기였다. 홍 관장과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의 작품 뒷거래 의혹이 꼬리를 물었고, 리움은 의혹들이 빚어진 음습한 배경으로 세간에 비쳤다. 결국 홍 관장은 사퇴하고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았다. 리움 기획전은 이후 3년 가까이 중단됐다.

리움은 2년8개월의 공백 뒤 2010년 8월 ‘미래의 기억들’로 전시를 재개하고, 이듬해 3월엔 홍 관장도 복귀했다. 그러나 총수 일가가 미술관 운영을 좌우하며, 그들의 개인 컬렉션 관리에 중심을 두는 리움의 기존 체제는 그대로였다. 되려 전시 기조는 명품과 유명 작가 중심으로 더욱 보수화, 위계화됐다. 동시대 미술계의 흐름과 담론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2007년 재단 학예실 구조조정으로 조직이 축소된 상태에서 홍 관장의 동생 홍라영 수석부관장이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총괄하게 되면서, 리움에서 고미술 분야와 연구출판 기능은 약화되고 현대미술 명품 중심의 전시에 비중을 두는 양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리움의 앞날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미술관 주인인 이건희 회장이 현재 병상에 있고, 내년이면 칠십대가 되는 홍라희 관장의 후계 구도도 안갯속이다. 삼성가 주변에선 일찍부터 리움의 후계자로 점쳐졌으나 스물여섯에 삶을 접은 이 회장의 셋째딸 고 이윤형(1979~2005)씨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고인은 리움 개관 당시 리허설과 준비팀 회의에까지 들어와 현장을 진두지휘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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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컬렉션은 이병철 선대회장 이래 삼성가의 정체성을 상징해왔다. 재계와 문화계 한켠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 체제를 굳힌 만큼 이 부회장이 컬렉션을 승계해 관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삼성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최근 리움 내 미술품 관리 쪽이 이 부회장 인맥들로 바뀐 것으로 안다. 미술 수업을 받진 않았지만, 그가 직접 컬렉션을 관리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리움 쪽은 “이 부회장이 미술에 나름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미술품 관리 분야 직원들을 부회장 인맥으로 교체한 일은 없다”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홍라영 부관장은 18일 열린 기념전시 설명회에서 “앞으로 리움의 10년은 과거 리움의 10년보다 한국 미술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어떤 변화를 선택하느냐다. 국가대표 컬렉션에 걸맞은 공공성과 열린 구조를 갖추라는 미술계 요구를 리움은 얼마나 포용할 수 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