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 개인전에 선보인 윌리엄 켄트리지의 영상설치물 ‘시간에 대한 거부’의 일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지난해 한국 개인전에 선보인 윌리엄 켄트리지의 영상설치물 ‘시간에 대한 거부’의 일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으로 국내 미술애호가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현대 미술 거장 윌리엄 켄트리지(62)의 작품세계를 담은 특별한 전시도록이 나왔다.

도서출판 수류산방에서 1년여의 편집 기간을 거쳐 최근 888쪽 대작으로 펴낸 <해찰: 언저리의 미학·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이 화제의 도록이다. 2015년 12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켄트리지 전시의 세부 얼개를 상세한 기록으로 풀어내고 그의 작품세계를 파헤친 인문학자들의 글과 작가 대담 등을 담았다.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했다가 미술과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거장 반열에 오른 켄트리지는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 인종차별, 학살, 폭압, 식민지배 등 개인과 사회에 남겨진 역사적 상처들을 만화, 연극,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미학적으로 탐색해온 참여미술의 대가다. 이 책의 제목 일부로 쓰인 해찰은 기웃거리고 집적거리는 것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목표로 바로 가지 않고 주위를 이것저것 살펴보고 만져보면서 가는 짓거리가 바로 ‘주변적 고찰’로 대변되는 켄트리지의 작품세계와 잇닿는다는 것을 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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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켄트리지 작 ‘시간의 거부(운명에서 도망간 그 남자)를 위한 드로잉’(2011).
윌리엄 켄트리지 작 ‘시간의 거부(운명에서 도망간 그 남자)를 위한 드로잉’(2011).

켄트리지는 남아공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백인 부동산업자의 삭막한 삶을 통해 투영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소호와 펠릭스’로 90년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이래 흑백차별, 식민지배 등이 지역과 개인에게 남긴 역사적 상처, 근대주의의 허상 등을 성찰하고 은유하는 인간극장을 연출해왔다. 보이체크, 모차르트의 휴먼 오페라를 새롭게 번안하거나 나미비아의 독일군 학살 사건 등을 다룬 초현실적인 인형 그림자극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그의 구작·근작들을 한자리에 선보인 지난해 한국 개인전 내용을 상세히 기록, 소개하면서 켄트리지의 작가적 내면을 다양한 담론으로 훑어보고 있다.

켄트리지 작품의 열렬한 애호가이자 그의 친구로서 이 책에 대담을 실은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작품세계를 서술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오래전… 순조롭게 상승하고 있는 듯 보였던 항공기(그 이름을 계몽주의라고 불러도 좋겠다…)가 있었다. 비행기는 왜 무참히 추락했던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블랙박스’의 뚜껑을 열어야만 한다… 켄트리지는 어두운 구멍을 들여다보듯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 즉 ‘우리 시대’의 우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