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서부전선 남방한계선 근처의 대전차방어용 콘크리트장벽. 서재철 제공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남방한계선 근처의 대전차방어용 콘크리트장벽. 서재철 제공

[토요판] 서재철의 DMZ이야기

③ 전쟁 유산

군과 함께 비무장지대(DMZ) 조사를 하던 때였다. 동부전선 인제지역, 한 감시초소(지피·GP) 근처의 비탈면 흙과 돌 부스러기 사이에 뼛조각이 있었다. 10㎝가 조금 넘는 크기였다. 뼈 한쪽 끝에 부러진 흔적이 보였다. 동행했던 군 간부는 “이 고지도 전쟁 때는 사흘이 멀다 하고 주인이 바뀐 곳이다. 그래서 유골이 나온 것 같다. 불발탄이나 탄피는 가끔 봤지만 유골을 직접 보는 것은 우리도 드물다”고 말했다. 이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미군인지 중국군인지 혹은 유엔참전군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의 최전선에서 어느 날 쓰러져간 청년일 것이다.

비무장지대 248㎞는 어디나 할 것 없이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그래서 어디나 할 것 없이 병사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1951년 5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전쟁은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정전협상이 포로송환 문제로 하염없이 늘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와 외교의 부재에 중국과 북한 그리고 남한과 미국의 청년들이 한반도의 허리에서 허망하게 죽어갔다. 서부전선부터 중부전선을 거쳐 동부전선까지 지금의 비무장지대는 대부분 전장이었다. 비무장지대 조사를 위해 다니다 보면 수류탄, 박격포탄, 각종 불발탄, 탄피와 탄클립 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포탄과 실탄을 쏟아부었는지 느낄 수 있다.

북한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근처에 설치한 고압선 철책. 서재철 제공
북한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근처에 설치한 고압선 철책. 서재철 제공
미국과 중국의 전쟁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나라는 중국이다. 사망 15만명, 부상 38만명가량이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중국과 미국의 전쟁이기도 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을 했고, 낙동강까지 밀린 남한은 사활을 걸고 버텼다. 그해 9월 미국이 전쟁에 참여했고, 10월말부터는 중국이 가세했다. 한국전쟁 중 약 2년10개월 동안은 국제전이었다. 중국의 모택동(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초기에는 미국과의 전쟁에 신중했지만, 일단 참전한 뒤에는 다걸기를 했다. 특히 전쟁의 주 전선인 ‘철의 삼각지대’(평강, 철원, 김화를 잇는 지역)를 중심으로 2년 동안 많은 출혈을 감수했다. 1950년 11월 45만명가량이던 지원 병력은 1951년 6월에는 95만명으로, 1953년 3월에는 135만명으로 증가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당시 1년 예산의 절반가량을 썼다고 한다.

중국군이 참전한 전투 중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금성지구 전투였다. 강원도 철원의 삼천봉부터 적근산을 거쳐 화천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비무장지대 지역에서 벌어졌다. 금성지구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를 비롯해 철의 삼각지대 전투나 동부전선의 단장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 등에 비해 덜 알려진 전투다. 하지만 정전협정 직전 양쪽이 전력투구한 전투였다. 중국이 1953년 135만명을 전선에 투입한 배경에는 금성지구 전투가 있었다. 중국군도, 미군과 국군도 마지막 힘을 쏟았다. 상감령 전투도 빼놓을 수 없다. 국군은 저격능선 전투로 표현한다. 삼강령은 현재 철원군 김화읍 감봉리에 있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오성산과 남한의 계웅산 일대에서 1952년 가을부터 1953년 7월까지 국군 2사단, 미군 7사단이 중국군 15군과 맞섰다.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워서 이긴 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군은 1만5천명가량이 전사했고, 국군은 사망자·부상자를 합쳐 4800명에 그쳤다. 그래서 국군은 상감령 전투를 승리한 전투로 평가한다. 반면 중국은 중부전선의 가장 큰 산인 오성산을 방어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감령 전투는 중국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비무장지대 인제 지역에서 발견한 유골.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병사의 유골로 추정된다. 서재철 제공
비무장지대 인제 지역에서 발견한 유골.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병사의 유골로 추정된다. 서재철 제공

북한은 폭격 트라우마

중국군은 상감령 전투의 오성산을 비롯해 비무장지대 일대 주요 고지와 격전지에서 지하갱도를 통해서 미군에 맞섰다. 중국군은 화력 면에서는 미군을 당할 수 없었다. 특히 공습과 폭격을 주로 하는 공군력에 있어서는 미군이 전쟁 초기부터 확실한 주도권을 쥐었다. 미군의 폭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규모의 폭격을 한반도에서 실시했다. 주일미군의 15개 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한 횟수가 100만회가 넘는다. 북한은 초토화됐다. 개전 초기부터 1951년 5월까지 사용한 네이팜탄이 300만갤런이었다. 북한에는 전투기에서 보이는 인공구조물이 거의 사라져 갔다. 중국군과 인민군의 군수보급은 차단당했다. 1951년 3월 미 극동군사령부는 의회에서 “더 이상 한반도에 폭격할 목표물은 없다”고 보고했을 정도였다.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의 공습은 중국군과 인민군의 새로운 대응전략을 낳았다. 중국군은 1951년 5월부터 대치선의 모든 방어진지를 지하로 구축해 요새화했다. 지금의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약 20~30㎞ 지대의 지하에 지하갱도와 땅굴을 실핏줄처럼 건설했다. 미군의 공습에 맞서기 위해 한반도 허리를 잇는 거대한 지하갱도를 구축한 것이다. 1952년 말까지 건설된 지하요새는 중국군이 판 것이 약 200㎞, 인민군이 판 것이 88㎞였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으로 일컬어진 지하요새는 중국군과 인민군의 확고한 전투방어 시설이었다. 당시 시설은 엄체호가 78만개, 길이 3683㎞였고 대피소, 지휘소, 토치카 등은 10만개나 되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과 공습은 정전 후에도 인민군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김일성은 1962년부터 ‘4대 군사노선’을 내걸며 ‘전 국토의 요새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비무장지대의 모든 관측소와 지피 등 군사시설을 깊은 지하갱도에 만들었다. 더 나아가 북한 전역의 군사시설을 요새화·지하화했다. 무기와 장비 등의 전쟁물자도 지하에 비축했다. 그래서 지금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쪽에서 북방한계선 쪽을 살펴보면 군사시설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북한의 지피나 관측소는 대부분 봉우리나 고지의 땅속에 만들어져 있다. 군데군데 환기구나 무기 개폐구가 그 존재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전쟁 이후 북한이 지하요새화에 집중한 데는 또 다른 공포도 있었다. 바로 핵무기다. 한반도 1차 핵위기는 1994년이 아니라 1951년이었다. 미국은 1951년 봄부터 한국전쟁에서 핵무기의 사용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반도 철원과 중국 동북의 만주 두곳을 목표 지점으로 핵무기 투하를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철의 삼각지대 위쪽 꼭짓점인 철원 오리산 일대를 투하 지점으로 설정했다. 미국 워싱턴 국립공문서관의 ‘극동군 문서철’의 기밀문서 중 작전의 목표물을 설정한 ‘핵무기 공격 가상표적’이라는 군사지도에 나와 있다.

미군이 준비한 원자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에 사용한 것의 3배나 되는 40㏏짜리였다. 다행히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유럽과 영연방의 강력한 반발과 소련에 대한 군사적 검토가 겹치면서 핵무기 사용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핵위기는 소련과 중국의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했다. 나아가 냉전의 구조와 방식을 결정짓는 계기도 됐다.

비무장지대 금성지구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 한국전쟁 당시 M1 소총 탄피(오른쪽)와 탄클립. 서재철 제공
비무장지대 금성지구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 한국전쟁 당시 M1 소총 탄피(오른쪽)와 탄클립. 서재철 제공
남한은 탱크 트라우마

한국전쟁은 국군에도 트라우마를 남겼다. 탱크에 대한 공포였다. 개전 초기 인민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낙동강까지 단숨에 질주했다. 국군은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의 기동전에 추풍낙엽처럼 밀려났다. 이때의 경험은 국군에 대전차방어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국군은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대전차방어 시설을 설치했다. 비무장지대와 민간인출입통제구역 주변, 차량이 지날 만한 통로와 개활지에 전차를 저지할 수 있는 각종 인공구조물을 촘촘히 설치했다. 그 결정판이 비무장지대 지오피(GOP) 철책선에 만들어진 콘크리트장벽이다. 콘크리트장벽은 파주부터 연천을 거쳐서 철원까지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의 개활지 곳곳에 모두 합쳐 23㎞가량 구축돼 있다. 높이 5~7m의 콘크리트로 만든 장벽이다. 하천에는 기둥을 박아 전차가 진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콘크리트장벽은 1990년대 초반 냉전 막바지에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됐다. 미-소 정상회담에서도 거론되며 논란이 증폭됐다. 대전차장벽은 비무장지대 안에 만들어져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었다. 북한은 이 점을 파고들어 ‘콘크리트장벽’이라는 이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김일성은 1990년 1월 신년사에서 비무장지대 콘크리트장벽을 ‘분단의 원흉’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다급해진 정부는 철원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의 멸공전망대에 외신기자까지 데려가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독일의 베를린장벽 같은 것이 아니라는 해명이었다.

그런데 콘크리트장벽 논란보다 몇년 앞서서 북한에 의한 대규모 정전협정 위반이 있었다. 군사분계선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북한이 비무장지대 내부에 248㎞에 걸쳐서 고압선 철책을 설치한 것이다. 고압선은 1만볼트, 6천볼트, 3천볼트, 2천볼트 등 4선의 고압선이 흐른다. 1986년 김정일의 지시로 시작됐다. 이 고압선의 설치로 북한의 기존 철책선인 북방한계선이 실질적으로 남하한 결과를 낳았다. 남방한계선에서 북한 철책선을 살펴보면 군사분계선 가까이 상당히 공격적으로 남쪽에 걸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민군은 고압선 철책으로 비극적인 사고도 겪었다. 1997년 7월 고압선 철책의 보강작업을 하던 인민군 15사단 1지대에 사고가 발생해 작업하던 병사 20명이 고압선에 타 죽은 것이다. 이 고압선의 설치 목적에 대해서는 ‘탈북 방지용’ ‘북파 침투 방지용’ 등 여러 해석이 있다.

전쟁의 기억과 흔적은 지금도 비무장지대 곳곳에 유무형으로 남아 있다. 과거형도 있지만 현재진행형도 있다.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외면하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평화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남방한계선 근처 하천에 설치돼 있는 대전차방어 구조물.  서재철 제공
남방한계선 근처 하천에 설치돼 있는 대전차방어 구조물. 서재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