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자살

〈자살, 차악의 선택-자살의 성찰성과 소통 지향성〉
박형민 지음/이학사·2만5000원

2008년 9월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한국인 자살자 수는 10만명당 24.8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 이 수치는 한참 낮춰잡은 것일 수 있다. 2000년 한국인 자살자 수는 통계청 집계로는 6460명이지만 경찰청 집계는 이보다 82.6%나 많은 1만1794명이었다. 2001년엔 경찰청 집계 1만2277명으로 통계청 집계 6933명보다 77.1%가 많았다. 통계청 집계는 관청 사망신고서에 토대를 둔 것으로 여기엔 자살을 사실대로 밝히기를 꺼리는 문화적 금기(터부)가 작용한다. 자살인데도 ‘병사’나 ‘교통사고’ 등으로 거짓 신고됐을 죽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타살인지 자살인지부터 밝혀내야 하는 경찰청 통계 쪽이 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일 수 있다.

하루 평균 35명. 도대체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대책은 없을까?

2007년 6월6일 74살의 남성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지난 4월15일 교통사고 이후 병원입원 15일, 통원치료 1개월 해 보았지만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는 호전되지도 않고 통증만 가중될 뿐이다. 내가 왜 이 자식들을 욕되게 하면서 이 길을 택했는지에 대해 나는 내 나름대로 인생철학이 있다. 내가 가족에게 폐가 되고, 사회에도 폐가 되고, 국가에도 아무 도움이 안 되면, 하루빨리 생사를 결정해야 된다는 나의 소신.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하서방한테는 아버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해라.”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한테는 알리지 말아라. 7월8일 2일간 시험이란다.”

 차악의 선택-자살의 성찰성과 소통 지향성〉
차악의 선택-자살의 성찰성과 소통 지향성〉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자살, 차악의 선택> 서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유서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자신의 자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짧은 몇 줄의 당부 내용이었다. 그 노인은 자신의 죽음을 손자에게 특정 일 이후에 알리라고 당부했는데, 그 이유는 손자의 기말고사가 그날 끝나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비록 짧은 몇 줄에 불과했지만 자살이 단순히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이후 많은 유서에서 자살자들의 다양한 의도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여러 자료를 구성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었다.”

지은이는 서울과 수도권, 비수도권 3개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일어난 자살사건 1321건 수사기록과 거기에 첨부된 405건의 유서들을 면밀히 읽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살을 8개 유형으로 범주화했다. 74살 노인의 자살은 이 가운데 ‘배려’형 자살의 예.

1998년 3월25일 14살의 동갑내기 여중학생 4명이 20층 아파트 옥상에서 함께 뛰어내렸다. 유서와 수사기록을 통해 자살방법, 자살자들의 문제상황, 상황에 대한 자기 인식, 욕구, 죽음의 선택과 자살 의도 등을 차례로 살핀 지은이는 이들의 자살 유형을 소통과 주변 사람들의 정서적 이해를 추구한 ‘이해’형으로 분류했다. 뇌출혈로 지체장애인이 돼 번번이 취업에 실패한 50살 남성이 부정한 아내를 원망하며 2000년 10월24일 음독자살한 것은 ‘고발’형.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다 20여억원의 빚을 남기고 2003년 2월23일 투신자살한 43살의 남성, 도박벽 있는 무능한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까지 빼앗긴 뒤 재혼했으나 생활고와 지병 때문에 2001년 4월13일 음독자살한 33살 여성은 자살을 도피처로 삼은 ‘회피’형. 바람피우면서 1억2000만원의 카드 빚을 남긴 난폭한 남편에게 끓는 식용유를 부어 중화상을 입힌 뒤 13살 딸과 함께 아파트 9층에서 뛰어내린 49살 여성의 저주는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영구적 상처를 안기려 한 ‘각인’형. 유서에 날것으로 담긴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런 사례들이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이밖에 해결, 비난, 탄원형까지 포함한 모두 8가지 자살 유형은, 자살을 사회구조와 여러 상황적 요인에 의해 야기된 ‘실패’와 아노미라는 ‘좌절’을 거쳐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뒤르켐적 자살연구의 기본적인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중요한 사회학적 매개변수들을 부가한다. 구조적 요인이나 경제 등 문제상황이 자살 고려의 주요 계기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가 직접 자살행위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에는 성찰과 의미부여라는 매개변수가 작용한다. 지은이는 이를 ‘소통적 자살’로 개념화한다. 소통적 자살은 자살자가 자신의 문제상황을 해석하고 자기 삶을 평가하면서 이를 주관적으로 내면화한 뒤 죽음을 준비하고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는 ‘성찰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출된 ‘메시지’,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타자 지향성’을 구성요소로 삼는다. 이 요소들에 자기 귀책적 평가와 타인 전가적 평가, 정서적 메시지와 문제지향적 메시지, 일방적 소통방식과 상호적 소통방식이라는 대립적 범주들을 섞어 조합한 것이 소통적 자살의 8개 유형이다.

지은이는 자살을 실패한 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나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행위로 보는 통념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언론도 자살을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고, 학계조차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논의하면서 자살을 선험적 사회문제로, 자연스럽지 않은 비정상으로, 그저 예방하고 관리하고 처리해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소통적 자살 개념에 따르면, 자살은 단순한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찰적으로 구성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요 전략이요 기획일 수 있다. 자살자들은 자살을 결코 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현실의 고달픈 삶이 최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몸짓으로 자살을 선택할 뿐이다. 말하자면 ‘차악의 선택’이다.

국내 최초의 유서 심층분석서라 할 <자살, 차악의 선택>은 그러니까 기존의 자살이론에서 소홀했던 자살자의 성찰과 의도를 중시하고, 구조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행위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행위 지향을 유형화하는 공을 세웠다. 이것이 ‘소통적 자살’ 개념의 이론적 의의라면, 이 개념적(언어적) 도구를 통해 자살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각 과정별로 그것을 막기 위한 단계적 개입전략을 효과적으로 수립할 수 있게 한 것은 그 실천적 의의라 할 수 있겠다. 개념이 없으면 이해도 없고, 이해가 없으면 실천도 없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지은이와 함께“금기·은폐가 문제 더 키운다”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국인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 가장 높은 이유를 굳이 물어봤더니 박형민(39)씨는 외국과의 비교사례들이 없기 때문에 뭐라 얘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통적 자살은 전체 자살 가운데 몇%나 되겠느냐고 또 물었더니, 이번에도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려면 표본추출 작업이 필요한데 내 자료는 편의표집이어서 한국 사회 전체를 대표한다고 하긴 힘들다. 따라서 몇%라고 얘기하는 건 무모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현상 포착을 위한 언어적 도구를 마련”하고 “(분석)틀을 제안한 정도”라며 따로 검증작업, 후속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깐깐한 박씨는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자살 연구로 2008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살, 차악의 선택>은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를 일반 독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해서 펴낸 것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2002년 들어갔는데, “쫙 깔린” 검찰청 기록조사 자료를 보고는 감격했단다. “사회과학자들은 자료 욕심이 많다. 자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때 자료에 파묻힌 내 모습에 스스로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지금까지도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자살 주제로 논문을 쓰자니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경험적 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운 주제라는 점이었다. 조사 대상이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어서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확보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 미수자나 유가족, 통계청의 ‘공식 통계연구’ 등을 생각했으나 그것들은 아무래도 자살에 대한 간접적인 접근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도덕적으로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연구를 방해했다. “무슨 기관 자살예방센터인가 하는 데서 발표회를 하면서 나를 토론자로 부르기에 갔는데, 전문가라는 사람조차 ‘어찌 제정신으로 자살을 한단 말이냐’는 식의 황당한 얘기를 했다. 은폐가 문제를 키운다.” 그러니 자살 관련 사회학적 연구가 국내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그 돌파구를 경찰의 수사기록과 유서에서 찾아냈다. “유서는 자살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인데다 작성 과정에 연구자의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도 적합한 연구자료다.”

물론 유서도 일률적인 틀로 분석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유서를 남기는 자살자는 전체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 돼 표본의 대표성에도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박씨는 ‘질적인 접근’을 통해 극복했다. 개인을 구조의 일방적 피해자로 보는 ‘양적인 접근’과 행위자의 주관적·주체적 평가와 해석과 선택을 중시하는 질적인 접근. “확률적 표본추출에 의한 통계적 일반화를 지향하는 양적 분석에 비해, 범주의 다양성과 새로운 사실을 지향하는 질적 분석은 표본의 대표성 문제를 완화할 수도 있다.”

문제발생 단계, 성찰과 해석 단계, 문제의 내면화 단계, 행위선택 단계, 자살실행 단계로 개념화한 ‘소통적 자살’의 단계마다 개입해서 이를 저지하는 실천적 개입전략과 관련해, 박씨는 환경도 개선하고 전문인력도 양성해야 하지만 예컨대 너무 많아 헷갈리는 각종 응급전화를 상담과 신고, 두 가지 정도로 통합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